서천의 다양한 명소를 소개합니다
활동리는 어성산을 진산으로 하고 있다. 어성은 한산 입향조 신영원의 아들 신담의 호이다. 신담의 호가 활동리 뒷산 이름이 된 것이다. 활동리는 은골, 은굴, 숭문동이라고도 부른다. 어성산에서 뻗어 내린 능산으로 가파르게 멈추고 마을 앞에 일자문성(一字文成)을 만들었다. 활동리에서 바라본 앞산은 한일자를 크게 써 놓은 듯한 능선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능선이 풍수지리적으로 문장가가 나올 마을이란다.
활동리에 고령신씨들이 살기 전에는 한산이씨들의 터전이었다. 화양면 망천의 한산이씨도, 기산면 신산리 한산이씨도 활동리에서 갈라져 나갔다. 그것은 입향조 신영원이 한산이씨 대사헌 이윤번의 동생 이윤수의 삼녀와 결혼한 다음 활동리에 살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오면서 본토박이 한산이씨는 이사가고 고령신씨들의 고향이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활동리를 대표하는 인물은 신석우와 신석초이다. 신석우는 서천·군산을 대표하는 대지주이다. 고령신씨는 본래 청빈한 모습이 멋이었는데 지주로서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그 덕분에 자손들이 서울로 유학하여 또 다른 사회를 준비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 중에 한 분이 석초 신응식이다. 그는 한국일보 주필이시며 고전적인 미학을 알기 쉽게 설파하신 분이다. 그의 작품으로는 <바라춤>이 유명하다. 프랑스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아 한국전통적인 멋을 맘껏 표현하고 있다.
1999년 서림문학회가 중심이 되어 석초 신응식 시비를 세우기 위하여 모금운동을 하였다. 한산모시관 뒤에 아담한 모습의 시비를 세웠다.
신응식의 작품속에는 자연, 전통, 우리 것이 배어 있다. 그가 화양면장을 지내고 한국학술원회원으로 생을 마감하셨지만 서천군민에게 영원한 화두를 던져 주셨다.
활동리는 고령신씨의 문장에 소재가 되지 않은 것이 없다. 활동리는 문학의 마을이고 역사의 마을이다.
신석초의 묘는 마을 동남쪽 구릉에 있다.
묻히리란다. 청산에 묻히리란다
청산이야 변할 리 없어라
나는 절로 질 꽃이어라
지새여 드는 법고 소리
이제야 난 굳세게 살리라
날 이끄는 흰 백합의 손도 바람도
아무것도 내 몸을 꺾을 리 없어라.
< 신석초 바라춤 서사(序詞) 마지막 연>
홍색 회장저고리
남끝동 자주고름
긴 치맛자락을
살며시 치켜들고
치마 밑으로 하얀
외씨버선이 고와라.
멋들어진 어여머리
화관 몽두리
화관 족두리에
황금 용잠 고와라.
은은한 장지 그리메
새 치장하고 다소곳이
아침 난간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