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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전

김인전
김인전(金仁全)일제강점기의 목사, 독립운동가
  • 생애 1876년 10월 7일 ~ 1923년 5월 12일
  • 출생지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1920년 2월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피선되었으며, 특히 재무예산위원으로 재정문제 타결에 솜씨를 보였다. 그 해 4월에는 임시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군사)으로도 활약하였고, 동시에 임시의정원의 부의장을 지내다가 1921년 5월에 사퇴하였다. 1921년 8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國務院) 학무차장과 이어 학무총장대리로 활약하였다.
출사 및 관직

금강하굿둑에는 서천에서 하나뿐인 김인전 공원이 있다. 김인전 공원은 서천에서 유일한 공원이며 동시에 사람 이름을 딴 특이한 공원이다. 서천 출신으로 훌륭한 인물이 제법 있지만 도로나 공원 이름으로 사용하는 인물은 경재 김인전 선생뿐이다. 백성을 구제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해결한 서천의 인물은 가정 이곡, 목은 이색, 월남 이상재. 석초 신응식, 의성김씨 임벽당, 남강 이임, 경재 김인전 등이 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김인전 선생만이 아무런 선양물이 없었다.

그래서 지난 2000년부터 김인전 선생 선양 사업을 위하여 김인전 선생의 제자인 임학규의 아들 임종석 장로와 함께 동분서주하였다. 그 결과 2004년 금강하굿둑에 김인전 선생 동상을 세울 수 있었다. 그 후 서천사람들은 김인전 선생 동상이 있는 금강 하굿둑 주변을 김인전 공원이라고 한다.

김인전은 어떤 인물이기에 공원 이름까지 김인전 공원이라고 하였을까? 김인전은 교육가이며 종교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이다. 이런 김인전을 어찌 금강하굿둑에 동상을 세웠을까? 혹자는 금강 대안 있는 채만식 문학관에 대하여 경각심을 주기 위하여 항일 운동가인 김인전 선생 동상을 이곳에 세웠다고 한다. 사실 김인전 선생과 연관이 있는 지역은 현재의 화양면 와초리 이다. 당시는 한산군 남하면 지사울이다. 김인전 선생의 업적을 남긴 공간이다. 그러나 금강하굿둑은 김인전 선생과 관련이 없다. 단지 많은 관광객이 오고가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다행인 것은 김인전 선생 동상을 세우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김인전 공원으로 명명한 것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지도, GPS, 네비게이션에 나타나 많은 사람들이 김인전 공원을 알고 있다.

김인전 공원은 알아도 인물 김인전선생에 대하여 잘 알고 있지 않다. 김인전 선생은 한산 지현리에서 태어나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내다 과로로 48세에 운명하였다. 김인전 선생의 48년 간의 삶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기는 김인전이 한산의 영재 육성을 위하여 한영학교를 세운시기이다. 김인전은 수원 군수 김규배의 아들로 태어나 한학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기독교를 믿었다. 그리하여 민족이 제국주의 일본에 침탈되는 것을 조금이나 막아보려고 1906년 아버지 김규배와 함께 기독계통의 한영학교를 세웠다. 한영학교는 한산의 영재를 육성한다는 비전을 갖고 지은 교명이다. 교장은 부위렴이며 김인전은 교사로 재직하였다. 재직하면서 평양신학에 재학하였다. 평양 신학을 졸업하자 1914년 전주 서문밖 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제2기는 김인전이 전주 서문밖교회 목사로 재직하면서 전주기전여자학교, 신흥학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즉 1919년 3월 전주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시기이다. 전주 3·1운동은 군산 3·1운동의 불씨가 되었으며 나아가서는 서천 마산 신장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즉 1906년부터 한산 한영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전주 군산 3·1운동에 이어 서천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 후 김인전 선생은 요시찰 인물로 지명되어 일경의 감시의 눈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전주 서울 신의주를 경유하여 배를 타고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제3기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국정원의장을 맡은 시기이다. 당시는 국민대표회의를 실시하여 여러군데의 임시정부를 하나로 조직화하여 임시정부의 법통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서로 다른 의견으로 대립하자 48세에 과로 사하였다. 김인전 선생은 임시정부에서 대한노병회를 조직하여 노동자와 군인을 하나로 묶어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계속되는 변절을 요구하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임시정부 자금지원이 부족하고 유능한 독립군 양성 문제도 발생하자 직업을 가지고 군인이 되는 노병일치제를 주장하여 실천하였다. 또 융합정신을 갖고 각기 다른 임시정부 노선을 통일하기위하여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갈망하였다. 국민대표회의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법통과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각기 다른 의견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김인전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임시정부에서는 휴무하고 상하이 정안사 외국인묘지에 안장하였다. 그 후 1993년 상하이에서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현충원 임정요인묘역에 박은식 노백린 신규식 등과 함께 안장되었다.

2004년 3월 서천군 마서면 금강하구에 김인전 선생의 동상 및 공적기념비를 건립하고 그 주변을 김인전 공원으로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2년 5월은 김인전 선생 서거 89주기이다. 그의 영혼은 하늘나라에 갔지만 그의 정신은 살아서 서천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자신에게 부여된 재능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나누라고 말한다. 김인전 선생의 재능기부는 참다운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한산에서 한영학교를 만들었으며 상하이에서는 인성학교를 만들어 민족혼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이 나라와 민족을사랑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그것이 나눔의 실천이었다. 김인전은 일찍이 할머니 부안 김씨 김열현으로부터 나눔을 보고 배웠다. 김열현은 춘궁기나 흉년이 되면 각 고을의 기민들에게 구휼곡식을 풀어 자선을 베푸니 한산은 물론 금강 건너 군산 옥구에서 까지 곡식을 받으러 왔다. 김인전 선생의 가문은 일찍부터 나눔을 실천한 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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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1-10-06 18: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