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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이색
이색(李穡)고려(총숙왕 15-태조5)문신, 학자
  • 생애 1328년 6월 17일 ~ 1396년 6월 17일 (68세)
  • 출생지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본관 한산(韓山). 자 영숙(潁叔). 호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이제현(李齊賢)의 문하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元)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한 고려말 문신
출사 및 관직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국하여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내고 귀국하여 전리정랑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예문응교(典理正郎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ㆍ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해 귀국하여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吏部侍郎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하여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 시행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ㆍ지공부사(知工部事)ㆍ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그뒤 좌승선ㆍ지병부사(知兵部事)ㆍ우대언ㆍ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ㆍ동지춘추관사ㆍ보문각과 예문관의 대제학 및 판개성부사 등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ㆍ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하여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여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ㆍ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년(우왕 1)우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ㆍ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고려말 창왕옹립과 유배

1389년(공양왕 1)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을 옹립, 즉위하게 하고,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하여 이성계(李成桂)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해에 이성계일파가 세력을 잡게 되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초(#이23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으나 수재(水災)로 함창에 안치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하여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관련하여 금주(衿州)로 추방되었다가 여흥ㆍ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하여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사상과 학문

그는 원ㆍ명교체기에 있어서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말 신유학의 수용과 척불론의 대두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ㆍ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王建)때의 중흥을 주장하였으며, 불교의 폐단시정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여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에 의하여 불교폐단 방지를 이루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여부로 판단하는 인간중심, 즉 성인ㆍ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인 유교역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ㆍ김종직(金宗直)ㆍ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을 하며, 저서에 《목은문고 牧隱文藁》와 《목은시고 牧隱詩藁》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작품소개

빈녀음(貧女吟)

境僻人來少(경벽인래소) : 사는곳 궁벽 하니 오는 사람 없고

山深俗事稀(산심속사희) : 산이 깊숙 하니 세상 일 알 수 없구나

家貧無斗酒(가빈무두주) : 집이 가난하여 한말 술 도 없으니

宿客夜還歸(숙객야환귀) : 묵고갈 손이 밤에는 돌아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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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1-10-06 18: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