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舒川)은 옛날부터 호칭이 많은 지역이다.
설림(舌林) , 서림(西林) , 서주 (西州) . 그리고 서천 (舒川)이라고 근대에 와서는 그리 부른다.
그 전에 남양 ( 南陽)이라고 부를 때도 있었다. 서천이란 호칭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작은 냇물이 펼쳐져서 수려한 지역을 이룬 곳이라 하여 서천(舒川)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서천에 본관은 둔 성씨는 서림이씨(西林李氏)가 있으며 , 집성마을을 이루고 토성(土姓)으로는 백(白), 나(羅), 구(丘) , 노(盧) , 이(李) , 정(丁) , 전(全)씨가 있으나 현시조는 고려때의 공신으로 서림군(西林君)에 봉해진 18세손 이세공(李世公)이 처음이 되어 20세손 이언충(李彦忠)이 고려의 원훈이 되어 서주군 ( 西州君)에 봉해짐으로써 연안이씨(延安李氏)에서 분적 이곳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거북바위 구암(龜岩)이라고도 부른다. 지역에 거북바위가 있으므로 이에 연유하여 그리 부른다.
강을 막고 물을 고이게 하는 보(洑) 머리에 있는 마을이라 보머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보모루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노송에 둘려싸였던 마을이라 송동이라고 부른다.
서천군의 군처이 있으므로 군사리라 부른다.
동변리라고도 부른다. 서천읍성 동쪽에 있으므로 동변 동변리라고 부른다.
서천향교(舒川鄕校)가 있는 마을이라 생교골이라고 부른다.
서변리라고도 부른다. 서천읍성 서편에 있는 마을이다. 서편 서편리라고 부른다.
상루(上樓)라고도 부른다. 누각위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웃다락골 그 아래쪽 마을은 아래쪽다락골 하루(下樓)라고 부른다.
인산(仁山)이라고도 부른다. 산이 수려하여 산덕분에 인물이 많이 태어나는 마을이라 해서 인산뫼라고 부르다가 인살뫼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남산아래쪽의 지역임으로 남산리라고 부른다.
산정촌(山亭村)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선비가 쉬어 갈 산의 정자같은 위치에 자리해 있다 해서 산정말 산정촌이라고 부른다. 신리(新里)라고도 부른다.
동산(東山)아래쪽의 지역에 위치해 있으므로 동산리 동산매 동산리라고도 부른다.
이 지역의 처음 마을이 원동산 바깥쪽에 있었으므로 밖송매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발송매라고 부른다. 안쪽 마을은 안솔매라고 부른다.
서천군 판산면(板山面)의 지역으로서 두모동(斗毛洞)과 선왕리(先旺里)의 이름을 따서 두왕리라 하였다.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집성촌을 이루는 지역이다.
산이 좋고 물이 좋은 마을이라 오정골이라고 부른다.
전에 오동나무정자가 있었던 마을이라 오정골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시장터가 있었던 마을이라 정장매라고 부른다.
서천군 판산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둔덕으로 되어 있으므로 둔덕이 둔더기라고 부른다. 평산신씨(平山申氏)들이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집성촌을 이룩했던 지역이다.
마을 지형이 학(鶴)처럼 생겼다 한다.
서천군 개곡면(開谷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사동(寺洞)과 유곡 (楡谷)의 이름을 따서 사곡리라 하였다.
사곡(寺谷), 사동(寺洞), 절골이라고도 부른다. 절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절이 있었던 지역에 마을이 생겼다.
유곡(楡谷)이라고도 부른다. 느름나무와 연유해서 느름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느릇이라고 부른다.
서천군 판산면(板山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삼수(三水)와 길산(吉山)의 이름을 따서 삼산리(三山里)라 하였다.
옛날에는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지역으로 그 때 큰 길은 산봉우리를 가로 질러 있었을 때 꼭 머리를 가르매 탄 것 같은 지형에 마을이 있으므로 가르매 이어 가릇매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다.
고산(古山)이라고도 부른다. 전북땅에 금강을 끼고 고살매라는 산이 있었다. 옛날에 천지개벽이 있을 때 그 산의 일부가 떠내려와서 이 곳에 자리하게 되므로 그 산의 일부라 하여 고살매라고 부르게 된 비지(飛地)라 전한다.
길산(吉山)이라고도 부른다. 옛날에는 바닷물이 지금의 마을앞까지 들어왔다한다. 땅이 질어서 보행이 불편하였으며 그 부근에 다리를 놓으므로 질매다리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라 한다.
장항선(長項線) 건너에 마을이 있으므로 철건너라고 부른다.
서천군 장항면(獐項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신장(新場)과 하송(下松)의 이름을 따서 신송리(新松里)라 하였다.
마을부근에 숲이 우거지고 그 안쪽으로 마을이 있다 하여 섭다리라고 부른다.
마을에 소나무가 많으므로 송동이라고 부른다.
신장(新場)이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장이 섰었으며 그 때는 새장터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송동 아래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하송이라고 부른다.
서천군 장항면(獐項面)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이곳에 있는 오석산(烏石山)의 이름을 따서 오석리(烏石里)라 하였다. 용궁전씨(龍宮全氏)가 집성촌을 이루며 오랫동안 거주하는 지역이다.
마을 뒷산의 모양이 용과 같다 해서 고룡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도 풀수 없는 천하의 명당자리가 숨어 있는 지역에 마을이 생김으로 기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 해서 진머루 외장티(外獐)라고도 부른다.
서천군 판산면(板山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태산과 월지의 이름을 따서 태월리라 하였다.
태산(泰山)이라고도 부른다. 테를 두른 듯한 산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의 지형이 용의 슬기를 따른 듯한 모습이라 하여 도룡곡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장수하는 사람이 많은 마을이며 유인이 많은 마을이라 장선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달맞이 하던 월고산(月高山)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월지(月支)라고 부른다.
지금은 평탄한 지형에 마을이 있으나 옛날에는 들과 낮은 야산지대로서 싸리가 많았으므로 싸리매 이어 싸르매로 부르는 마을이다.
갈모처럼 생긴 산이 있으므로 갈뫼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금산(衿山)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지형이 논의 등처럼 생겼다 해서 논등골이라고 부르다가 논등굴로 부르는 마을이다. 조선시대가 개국되면서 고려때의 선비들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신조에서 낙향하여 절개를 지킨 선비와 그 아낙의 많은 마을이라 금산(衿山)이라고도 불러 온 마을이다.
동방죽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방죽재라고 부른다.
옛날에 소금을 구었던 마을이다. 숲이 우거졌던 마을이다.
마을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화산(花山) 이라고도 부른다. 산이 마을을 싸고 있는 것 같은 형국이며 꽃이 많은 산이 있으므로 이불매 또는 화산이라고 부른다.
서천군 장항면(獐項面)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화리(禾里)와 성북(城北)의 이름을 따서 화성리라 하였다. 평해구씨(平海丘氏)가 집성촌을 이루는 지역이다.
담화(淡花)라고도 부른다. 마을 지형이 연꽃 이 물에 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한다. 담화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화여 대마굴이라고 부른다.
구석(龜石)이라고도 부른다. 한편 구석진 곳에 마을이 있다는 풀이와 거북돌을 연유해서 구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마을이다.
마을지형이 남생이의 형국이라 한다.
마을지형이 시루처럼 생겼다 한다. 화리(禾里)라고도 부른다.
어은(魚隱)이라고도 부른다. 사방이 막혀 있으나 은자(隱者)들이 많이 은거하는 마을이라 어은(魚隱)이라고도 부른다.
산의 뒤에 마을이 있으므로 잣디라고 부른다.
마을 지형이 매처럼 생겼다 해서 새뫼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