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산군(韓山郡)의소재지였으니 그 북쪽이 되므로 북부면(北部面)의 지역이었다.
한산(韓山)이란 명칭은 고려초기부터 사용하였다. 즉 큰 고을이란 뜻도 되고 이 나라의 마을이란 뜻으로도 해석을 하나 이름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가장 많이 해석된다.
한산에는 본관(本貫)을 한산에 둔 한산이씨(韓山李氏), 고령박씨(高靈朴氏), 밀양박씨(密陽朴氏), 김해김씨(金海金氏), 전주유씨(全州柳氏)가 집성마을을 이루고 많이 거주하고 있으나 본향(本鄕)에는 본관(本貫)을 둔 성씨(姓氏)가 많이 살지 않는다는 속설과는 달리 한산이씨는 한산의 총 호수 1900여호 중 500여호가 한산이씨가 거주하고 있을 만큼 대성(大姓)을 이룬다. 한산이씨의 시조(始祖)는 호장(戶長) 이윤경(李允卿)이다. 그리고 한산에 본관을 둔 성씨로 정씨(程氏)도 있다.
한산군 동하면(東下面)의 지역으로 구실 구실다리 구수동 구동리라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구동리라 해서 화양면(華陽面)에 속했다가 1937년 한산리라 해서 화양면으로 옮겼다.
구수,구실다리, 구수동, 구동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구실다리라는 다리가 있어서 옛날부터 운이 좋은 다리로 소문이 났었다. 그래서 과거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전국에서도 이 다리를 건너야 급제 할수 있다 해서 많은 선비들이 과거시(科擧試)를 앞두고 이 다리를 건넜으며 시집가는 색씨들도 이 다리를 건너야 잘 산다 해서 가마를 타고 건너가곤 했다. 그 구슬다리가 있으며 마을은 강병도강형(强兵渡江形)의 명당이고 산수의 아름다움을 음양으로 갖춘 마을이라 구수동,구동,구수골,구동이라고 부른다고한다.
일광리 일광치(日光峙)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일광사(日光寺)라는 절이 있었던 마을이다.
한산군 동상면(東上面)의 지역으로서 나다리 또는 나교(羅橋)라 하였던 지역이다.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나교리가 되었다.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많이 살며 60여호의 그 집성마을도 있다.
나교(羅橋)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한 도승이 지나가면서 이 곳에는 풍취나 대형(風吹羅帶形)의 명당이 있으며 뒤에 반드시 다리가 놓을 것이다 하였다는데 일제말기에 이지역에 덕취지(德就池)가 생김에 따라 도승의 예언이 맞아떨어졌다는 마을이다.
마을에 감나무가 많았으므로 감나무골이라고 불러온다.
한산군 동상면(東上面)의 지역으로서 단정(丹亭)의 위쪽이 되므로 위단정이 또는 상단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단상리(丹上里)가 되었다.
단서(丹西) 단서리(丹西里)라고도 부른다. 건너편에 마을이 있으므로 건너말이라고 부르고 단정이 서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단서 단서리라고도 부른다.
단정(丹亭) 대숲안 죽림(竹林)이라고도 부른다. 흙이 붉은 단산(丹山) 아래에 있으므로 단정이라고 부르고 앞에 대숲이 많으므로 대숲안 죽림(竹林)이라고도 부른다.이 마을에 조선시대 동상면(東上面)면사뭇의 터가 있다.
단정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단상리(丹上里)라고도 호칭한다.
옛날에 절이 있었으므로 절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절굴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단정의 서쪽으로 한 구석진 곳에 있으므로 구억뜸이라고 부른다.
한산군 동상면(東上面)의 지역으로서 단정이 아래쪽에 있으므로 아래단정이 하단(下丹) 단하(丹下)라고도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단하리(丹下리)가 되었다.
대추나무가 많이 있는 마을이라 대추나뭇골이라고 부른다.
벌말이라고도 부른다. 벌판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비탈진 곳에 있으므로 잘피탈이라고 부른다.
한산군 북부면(北部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동자(童子)와 유산(由山)의 이름을 따서 동산리라 하였다.
마을 지형이 꼭 동자가 북을 치는 형국이라 해서 동자북이라고 부른다.
산이 아름답고 땅이 기름져서 산과 들이 조화를 이루는 마을이다. 유산(由山)이라고 부른다.
한산군 동상면(東上面)의 지역으로서 산의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있는데 마을이 되었으므로 동지매 또는 동지(冬至)라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동지리라하여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옛날에 신당이 있었으므로 그때부터 당골이라고 부른다.
월성산(月城山)의 주봉따라 남쪽으로 흘러내린 하녹(下록)에 자리해서 금강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옥토기가 월성산에서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는 형국이라 한다.그래서 옥토망월(玉兎望月)의 형상이라 토정(土亭) 이지함(李之涵)이 이 지방을 지나다가 산형이 옥토(玉兎)와 같다 하여 토산(兎山) 토기뫼라고 부르게 하였다는데 그 후 변해서 톨뫼라고도 부른다 한다.
한산군 동상면(東上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갈마(渴馬) 녹양(綠楊)의 이름을 따서 마양리라 하였다.
갈마(渴馬) 갈마리(渴馬里)라고도 부른다. 500여년전에 역마부가 이곳을 지날 때 말이 목이 타서 신음함으로 물을 얻으러 마을에 들어갔으나 한발이 심할 때라 물을 얻어오지 못하고 말은 목이 타서 죽었다 한다. 그래서 그 후 부터는 더욱 물이 귀해졌다 하고 밤에는 말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한다. 그래서 목이 타서 죽은 갈마에 연유하여 갈마, 갈마매,갈마리라고 부른다. 일설에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 있다는 마을이란 설도 있다.
옛날에 한 지관이 이곳을 지나면서 하는 말이 땅위에는 말라있어도 땅속에는 물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하여 큰 고을이 될 지형이라 해서 강상구레라고 부르게 하였다 한다.강성(江城)이라고도 부른다.
녹양(綠揚) 녹양리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푸른 숲속에 가려있는 것 같다 해서 그리 부른다.
잠두리(蠶頭里)라고도 부른다. 마을의 지형이 누에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누에머리 잠두리라고 부른다.
마을이 남쪽으로 아늑한 산아래 위치해 있으므로 안산매라고 부른다.
한산군 북부면(北部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한산읍성(韓山邑城)의 북문밖에 위치함으로 성외리라 하고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한산읍성 북문밖에 마을이 있으므로 북문밖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붐밖이라고 부른다.
송곡리와 종자리에 연이여 있는 넓은 들에 성외리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한 겨울철이면 기러기와 오리가 많이 날아온 들에 마을이 있으므로 오라리라고 부른다.
한산군 동상면(東上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송하(松下)와 오곡(烏谷)의 이름을 따서 송곡리라 하였다.
오곡(烏谷)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지형이 까마귀처럼 생겼다 해서 가그말 오곡(烏谷)이라고 부른다.
소나무가 우거진 산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송하라고 부른다.
한산군 동상면(東上面)의 지역으로서 산에 소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솔매 솔뫼 또는 송산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송산리(松山里)라 하고 서천군편입되었다. 고령박씨(高靈朴氏)가 50여호 거주하며 그 집성마을도 있다.
월촌(越村)이라고도 부른다. 옴지편 서쪽에 있는 마을로 건너편에 마을이 있으므로 건너말이라고 부른다.
군촌(軍村)이라고도 부른다. 한때 군사들이 머물렀던 마을이라 군말 군촌이라고 부른다.
회촌(回村)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큰 마을을 돌아가서 자리해 있으므로 도란말 회촌이라고 부른다.
소재 철촌(鐵村)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지형이 꼭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해서 그리 부른다.
영촌(嶺村)이라고도 부른다. 고개아래 마을이 있으므로 잿말 영촌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차돌이 박혀있으므로 차돌배기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차득배기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냉정(冷井)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찬샘이 있으므로 찬샘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참샛골이라고 부른다.
한산군 동상면(東上面)의 지역으로서 금강가에 새로 나루터가 생기고 이어 마을이 생겼으므로 신성개 또는 신성포(新城浦) 그리고 신성(新城)이라 하였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개혁때에 신성리라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곰개나루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나루개라고 부른다.
신성개 신성포(新城浦)라고도 부른다. 나루가 생기고 새로 마을이 생겼으므로 그리 부른다.
한산군 동상면(東上面)의 지역으로서 저수지와 뚝이 있으므로 여사지 여사제 변하여 여수지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여사리라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여사리(余士里) 여사지 여시제라고도 부른다. 여사제(余士堤)라고 부르는 방죽 가까이 마을이 있으므로 그리 부른다.
한산군 동하면(東下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연 봉오리처럼 생겼으므로 연봉(蓮峯)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연봉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신성개 신성포(新城浦)라고도 부른다. 나루가 생기고 새로 마을이 생겼으므로 그리 부른다.
한산군 동상면(東上面)의 지역으로서 저수지와 뚝이 있으므로 여사지 여사제 변하여 여수지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여사리라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교항(橋項)이라고도 부른다. 다리 근처에 마을이 있으므로 다리목 교항이라고 부른다.
북아시 남쪽에 있는 마을로 큰 나무가지 아래쪽에 마을이 있다 해서 그리 부른다.
북촌(北村)이라고도 부른다. 북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북아시 북촌이라고 부른다
연봉리라고도 부른다. 마을 지형이 연 봉오리처럼 생겼다는 마을이다.
한산군 동하면(東下面)의 지역으로서 더운 물이 나오는 샘이 있었으므로 온수골 온수동(溫水洞)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원숫골 온동(溫洞)이라고 부르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개혁때에 온동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기산(箕山)이라고도 부른다. 왕재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산과 들과 물이 좋아 3년 고생끝에 낙을 가져온다는 마을로 사람살기 좋은 산수지라 하여 기산(箕山)이라고 기실매라고도 부른다.
더운 물이 나오는 샘이 있으므로 온동 온수굴 원숫골 온수동(溫水洞)온동이라고 부른다.
한산군 동하면(東下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용두(龍頭)와 화산(花山)의 이름을 따서 용산리라 하였다.
화산리(花山里)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있는 작은 산이 마치 꽃이 땅에 떨어진 것처럼 생겼다 해서 꽃뫼 화산(花山) 화산리라고 부른다.
마을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용머리,용두(龍頭),용두리(龍頭里)라고 부른다.
한산군 동상면(東上面)의 지역으로서 이 곳에 바위가 있어서 이 바위를 기점으로 한산군(韓山郡)과 임천군(林川郡)의 경계를 가늠하였으므로 가늠바위로 부르다가 변하여 가남바위라 하고 또한 조선시대에 이곳에 간법암원(看法岩院)이 있었으므로 간법암원 또는 원매 원산이라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원산리라 하고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 한산군과 임천군의 경계 표적이 되는 바위가 있으므로 그 바위를 가남바위라고 불렀었다. 그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가남바위 가늠바위 간법암원이 있었으므로 간법암원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원매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학문에 깊은 은자들이 자리한 마을이라 야은(野隱)이라고 부르다가 야인(也印)이라고 부른다.
원매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밭고랑이 다섯가래로 되어 있으므로 오전이라고 부른다.
한산군 북부면(北部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종지처럼 생겼으므로 종지울 또는 종지동(種芝洞) 종동(種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종지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
종지동 종동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지형이 종지처럼 생겼다 해서 그리 부른다.
천왕사(天王寺)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천왕사라는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 그리 부르는 마을이다.
한산군 북부면(北部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죽촌(竹村)과 고촌(枯村)의 이름을 따서 죽촌리라 하고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죽촌(竹村)이라고도 부른다.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대실 죽동 죽촌이라고 부른다.
대실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아울이라고도 부른다. 땅이 메마른 마을이라 그리 부른다.
한산군 북부면(北部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건지산 고개의 이름을 따서 지현리라 하고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골싸기에 있는 마을로 산돼지가 많이 있었으므로 돼지굴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한산군의 옥이 있었던 마을이라 옥거리라고 부른다.
교촌(校村) 교촌리 생교굴이라고도 부른다. 한산향교(韓山鄕校)가 있는 마을이다
탑동(塔洞)이라고도 부른다. 돌탑이 있는 마을이라 탑골 탑동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 한산의 읍내였던 마을이다.
한산군 동상면(東上面)의 지역으로서 싸리나무가 많으므로 싸리매 축산(山) 축동(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축동리라 하고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옛날에 사당이 있었으므로 사당굴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절이 있었던 마을이다.
싸리나무가 많으므로 싸리매 축산(山) 축동(洞)이라고 부른다.
한산군 북부면(北部面)의 지역으로서 범바위가 있으므로 범바위라고 부르다가 범배 또는 호암(虎岩)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호암리라 해서 서p>편입되었다.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집성촌을 이루고 거주하던 리다.
산성리(山城里)라고도 부른다. 건지산성 안에 마을이 있으므로 산성안 산성리 성안이라고도 부른다.
범바위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범바위라고 호칭하는 바위가 있으므로 그리 부르는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