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비인현(庇仁縣)의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비인읍내의 동쪽이 되므로 동면(東面)에 속했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이 곳의 고지명(古地名) 너덜이 즉 나무판자로 다리를 놓았다 해서 널다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너덜이 판교(板橋)의 이름을 따서 판교면 이라하고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1930년대만 하여도 광천(廣川) 논산(論山)과 함께 충남의 3대 시장으로 꼽혔으며 특히 우시장(牛市場)이 유명하다.
면내에 거주하는 대성(大姓)은 경주김씨(慶州金氏)가 140여호 평산신씨(平山申氏)가 130여로 충주지씨(忠州池氏) 80여호 홍주이씨(洪州李氏)가 50여호 양근김씨(楊根金氏) 30여호 통천김씨(通川金氏) 25호 광주이씨(廣州李氏) 21호가 뿌리를 내리고 거주하는 성씨이며 그 씨족의 집성마을도 있다.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이 곳에 있는 녹마산(綠馬山)과 비대(飛垈)의 이름을 따서 마대리라 하고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가루개라고도 부른다. 고개아래 즉 가루개재 아래에 있는 마을로 칡이 많은 마을이라 갈로 가루개라고 부른다.
난곡(蘭谷)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산제당(山祭堂)이 있으므로 당마루라고 부른다.
큰짐승 즉 범이 자주 나타났던 마을이라 범울이라고 부른다. 마을지형이 범을 닮았다고도 한다.
비대리(飛垈里)라고도 부른다. 매를 비롯하여 많은 날으는 새들이 많이 모여드는 마을이라 그리 부른다.
비인군 이방면 (二房面)의 지역으로서 옛날부터 덕을 베푸는 사람이 살았다 하여 만덕(萬德) 또는 만덕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만덕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충주지씨(忠州池氏)가 많이 살며 그 집성촌도 있다.
선풍리라고도 부른다. 옛날부터 선인들이 자주 드나들었으며 선비들이 많이 대를 이으며 사는 마을이라 해서 선풍, 선풍리, 선팽이라고도 부른다.
와티(瓦티)라고도 부른다. 옛날 이 마을에서 기와를 구웠다 해서 왜재 와티라고 부른다.
자라리(者羅里) 별곡(鱉谷)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지형이 자라처럼 생겼다 해서 그리 부른다.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문덕(文德)과 신곡(薪谷)의 이름을 따서 문곡리라 하고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문덕(文德) 문덕리(文德里)라고도 부른다. 문수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서 덕을 쌓는 사람이 그 산아래에 산다 해서 문덕이 문덕 문덕리라고 부른다.
신곡(薪谷)이라고도 부른다. 마을과 마을부근에 섭이 많이 있다 해서 섭실 신곡이라고 부른다.
주항(酒缸)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수렁(수랑)이 많이 있다 해서 수랑굴 또는 주항이라고 부른다.
장좌(長佐)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장자가 살았다 해서 장재울 장좌라고 부른다.
기와를 굽던 마을이라 와매라고 부른다.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복대(卜大)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복대리(卜大里)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가곡(柯谷)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가래나무가 많으므로 가실 가곡이라고 부른다.
부소산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부소티라고 부른다
마을이 분지에 놓여 있으므로 분동이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마음에 여유있는 사람이 모여사는 마을이라 유춧골이라고 불러온다. 옹기점도 있는 마을이다.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상산(上山)과 가좌(可佐)의 이름을 따서 상좌리라 하였다.
마을 지형이 가재처럼 생겼다 해서 가자울 가좌(可佐)라고 부른다.
음지가 별로 없는 마을로서 빛이 솟는 마을이라 해서 광촌이라고 부른다.
가자울 서쪽에 있는 노적봉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산이름을 따서 노적봉이라고 부른다.
황곡(黃谷)이라고도 부른다. 흙의 빛깔이 황색인 지역에 마을이 있다 해서 누릉굴 또는 황곡이라고도 부른다.
능마궁지라고도 부른다. 명당자리로 지목되는 명당이 있는 마을로 왕족이 묻힐 곳이 있다 해서 능마궁이라고도 부른다.
먹재라고도 부른다. 옛날에는 나무가 우거져서 어둠 침침한 고개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묵티 먹재라고 부른다.
주동(舟洞)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의 지형이 배와 같다 해서 뱃굴 주동이라고 부른다.
냉정(冷井)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샘이 있는데 여름에는 여름같고 겨울에는 물이 덥다는 샘이 있으므로 온동 또는 냉정이라고 부른다.
삼흘(三屹)이라고도 부른다. 세 봉우리가 있는 마을이다.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방망이처럼 생겼으므로 솔맹이 소을망리 또는 설명 설맹이 변하여 송수침 또는 송암이라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수성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마을이 골짜기에 있으므로 골말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탑이 있었으므로 탑거리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장대봉 아래의 깊은 골짜기가 되므로 깊은골 또는 심동(深洞)이라 하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심동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마을 지형이 달처럼 생겼다 해서 월봉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달맞이를 즐기는 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깊은 골짜기 아래 마을이 있으므로 깊은골 심동(深洞)이라고 부른다.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와우형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 하여 우라실 우리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우라리라 하여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경주김씨(慶州金氏)가 오래 동안 뿌리를 내린 고장이며 그 집성마을도 있다.
마을에 차돌이 박혀있으므로 차돌배기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차득배기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냉정(冷井)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찬샘이 있으므로 찬샘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참샛골이라고 부른다.
가치고개 작티리(鵲티里)라고도 부른다. 까치가 많이 서식하는 까치고개 작티리라고 불렀으며 변하여 가치고개라고도 부른다.
마을과 그 지역에 와우형의 명당이 있다는 마을이다.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저동(苧洞)과 산동(山洞)의 이름을 따서 저산리라 하였다. 평산신씨(平山申氏)가 오래도록 뿌리를 내린 지역으로 그 집성마을도 있다.
글을 읽고 깨우치는 강당이 있었으므로 강당이라고 부른다.
저동(苧洞)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서 저마도 많이 생산하였으며 모시도 많이 직조하는 마을이라 옛날부터 모시울 저동이라고 부른다.
산악지대에 마을이 있으므로 산동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사기점이 있었던 마을이다.
마을이 골짜기에 있으므로 짐사굴이라고 부른다.
큰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이라 해서 큰골이라고 부른다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너다리가 있으므로 너다리 널다리 또는 판교(板橋)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판교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감랑굴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한 도승이 말한 대로 단 음식을 경작하면 마을이 번창한다 해서 감 감자 강낭콩 같은 종류의 생산으로 마을이 흥해졌다 해서 강동 강랑굴이라고 부른다 한다. 고려때 이 곳의 감은 진상품이었다 한다.
고락(古樂)이라고도 부른다. 이 부근에서는 가장 오래된 마을로 한 선비가 전원에 묻혀 명성있게 살은 마을이라 고락이라 부른다 한다. 일설에는 고락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더운 물이 나오는 샘이 있으므로 온동 온수굴 원숫골 온수동(溫水洞)온동이라고 부른다.
궁굴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지형이 궁궐같다 해서 궁곡 궁국이라고 부른다.
녹점 유점이라고도 부른다. 놋점이 있었던 마을이다.
대나무숲이 있는 마을이라 대섶말이라고 부른다.
서당이 있었던 마을이라 서당굴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절이 있었던 마을이다.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검고 큰 바위가 마을 중간에 있었으므로 검은바위 검은배 또는 현암(玄岩)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현암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옛날에는 타향에서 이 곳에 들어와서 정착하는 사람들이 많은마을이라 도래라고 불렀다 한다.
옛날에는 옴팡진 땅이 많았으나 그 곳을 정리하고 마을이 생겼다고 하여 구풋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구풋골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돌이 많았던 마을이라 그리 부른다.
옛날에는 집이 많이 들어섰던 마을로 밤이 되면 이 지역을 밝히듯 등불이 찬란하였다 하는데 꼭 판교의 등대같았던 마을이라 한다.
부처가 있었던 마을이다.
마을 뒷산이 꼭 길마처럼 생겼다 해서 질마제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뒷골 또는 후동(後洞)이라 하였던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후동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충주지씨(忠州池氏)가 많이 살며 그 집성마을도 있다.
각동(角洞)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가에 새로 마을이 생겼으므로 갓골 각동이라고 부른다.
방선(方仙)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처음 생길 때부터 신성한 백성들만 모여서 마을이 이룩되었으며 그 후에도 선지로 이름난 마을이라 방선이라고 부른다 한다.
뒷골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뒷쪽에 마을이 자리해 있으므로 후동 뒷골이라고 부른다. 임진왜란때는 피난처로 유명했었다 한다.
비인군 이방면(二方面)의 지역으로서 숲이 차츰 우거져감으로 흥림(興林)이라고 불렀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서천군 종천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에 판교면에 편입되었다.
궁굴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지형이 궁궐같다 해서 궁곡 궁국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사당이 있었으므로 사당굴이라고 부른다.
뒤실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뒤쪽에 자리해 있으므로 그리 부른다.
모곡(茅谷)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띠로 둘러있다 해서 띠울 모곡이라고 부른다.
산과 들사이에 아담한 들을 끼고 마을이 자리해 있다 해서 새야라고 부른다.
서천군 문장면(文章面)의 지역으로서 높고 험한 고개가 있으므로 등고개 또는 등고(登古)라 불렀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등고리라 하여 문산면에 편입되었다가 뒤에 판교면에 편입되었다.
윗말이라고도 부른다. 등고개 위쪽 작은 산줄기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그리 부른다.
등고(登古)라고도 부른다. 험한 고개아래 있으므로 그리 부른다.
서천군 문장면(文章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금단(今丹)과 만덕(萬德)의 이름을 따서 금덕리라고 하였다. 안동권씨(安東權氏) 50여호의 집성마을이 있다.
마을에 망덕사(望德寺)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이에 연유하여 만덕이라고 부른다.
산막곡이라고도 부른다. 사방으로 산으로 둘러쌓인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산막골 산막곡이라고 부른다.
원다곡(元多谷)이라고도 부른다. 골짜기 안쪽으로 마을이 있으므로 그리 부른다.
금단리(金丹里)라고도 부른다. 또한 변해서 검단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에 권좌에 올랐던 안동권씨가 사방에 씨족의 권세를 위하여 금단의 서약을 많이 하였었다. 명문으로서 자리를 지키는 인물들이 사는 마을이라 금단이라 부르고 변하여 검단이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