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산(千房山)의 중앙지대에 위치한 문산면은 조선 태종 13년 서천군에 속하였으며 대부분이 서천군 두산면(豆山面)면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번거로운 곳은 아니었으나 광해군과 인조때 명문들이 정착함으로써 은거지로 굴지의 고을로 꼽혔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문장면(문장,북산,등고,금덕)과 두산면(신농,금복,수암,지원,구동,은곡)을 병합하여 문장(文章)과 두산(豆山)의 이름을 따서 문산면(文山面)이라고 하였다. 이후 1982년 등고,금덕 2개리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판교면에 편입되면서 지금의 문산면이 되었다.
현재도 거주하는 대성(大城)으로는 풍양조씨(豐壤趙氏), 평해구씨(平海丘氏), 언양김씨(彦陽金氏), 안동권씨(安東權氏), 수원백씨(水原白氏)가 있다.
서천군 두산면(豆山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구변(九邊)과 대동(大洞)의 이름을 따서 구동리라 하였다. 언양김씨(彦陽金氏)의 집성마을이 있었다.
마을에 큰 감나무가 있었으므로 감나뭇골이라고 부른다.
대동(大洞) 대동리(大洞里)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이 고장에서는 크다 해서 황골 대동 대동리라고 부른다.
마을에 찬 샘이 있으므로 참샛골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고개아래에 있으므로 잿말이라고 부른다.
마을 지형이 소라처럼 생겼다 해서 소라틔라고 부른다.
서천군 두산면(豆山面)의 지역으로서 진복굴 짐복굴 또는 금복(金福) 북계(北溪)라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금복리라 하였다.
냇물 건너에 마을이 있으므로 내건너라고 부른다.
마을지형이 노루의 형국이라 노로지라고 부른다.
유점(鍮店) 유점리(鍮店里)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놋점이 있어서 놋점,유점, 유점리라고 부른다.
마을에 신당을 모신 당산이 있으므로 당산이라고 부른다.
진북굴 짐북굴 북계(北溪)라고도 부른다. 천연적으로 자연미를 되살린 지역에 북쪽을 향해 자리한 마을이다. 굽이치는 계곡마다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그 안에 기름진 땅에 자리한 마을이라 진복굴 짐복굴 북계라고 부른다.
의식동(衣食洞)이라고도 부른다. 참옻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그리 부른다.
원당(院堂)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원당이 있었으므로 원당 원댕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평전(平田) 평전리(平田里)라고도 부른다. 평지에 마을이 있다 해서 그리 부른다.
행자막동(杏字幕洞)이라고도 부른다. 은행나무 정자가 그늘을 조성하고 아늑한 마을이라 해서 행지막골 행자막동이라고 부른다.
서천군의 지역으로서 문장골 또는 문장동(文章洞) 그리고 문장(文章)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문장리(文章里)라 하였다. 풍양조씨(豊壤趙氏) 수원백씨(水原白氏)의 집성마을이 있었다.
마을에 넓은 바위가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지형이 배의 형국이어서 동네의 샘을 파면 마을이 망한다는 구전이 전해오는 마을이다.
금성산(錦城山)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백양(栢楊) 뱅굴이라고도 부른다. 잣나무와 버들나무가 많았던 마을이라 한다.
농사일이 잘된다는 마을로 특히 벼농사가 잘 된다 해서 화리라고 부른다.
서천군 문장면(文章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북향(北向)과 우산(牛山)의 이름을 따서 북산리라 하였다. 풍양조씨(豊壤趙氏)가 많이 살며 그 집성마을도 있다.
북향(北向) 북향리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북쪽을 향해 있으므로 북향 북향리 북향골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서당이 있었으므로 서당굴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와우형(臥牛形)의 명당이 있다 해서 우산이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마을에는 약수로 통하는 찬물이 나온다 해서 한수터라고 불러오는 마을이다.
도장굴이라고도 부른다. 글을 읽고 강론하기도 하는 도장이 있었다 해서 도장 도장굴이라고 부른다.
서천군 두산면(豆山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정수(淨水)와 건암(健岩)의 이름을 따서 수암리라 하였다.
건암리(健岩里) 선바위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선 바위가 서 있다 해서 건암 검암리 선바위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마을 지형이 소라처럼 생겼다 해서 소라실이라고 부른다.
정수(淨水) 정수리(淨水里)라고 부른다.
탑곡(塔谷)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사층탑(四層塔)이 있으므로 탑골 탑곡이라고 부른다.
서천군 두산면(豆山面)의 지역으로서 신장군(申將軍)이 개간 하였다는 200마지기의 답에 농소가 있었으므로 신농소 신농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신농리(神農里)라 하였다. 평해구씨(平海丘氏)가 많이 살며 그 집성마을도 있었다.
마을에 글을 읽는 강당(講堂)이 있었으므로 강당이라고 부르다가 강댕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도마다리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에 행인의 편의를 도와주는 원집이 있었으므로 원집이라고 부르는 마을이고 또한 도마다리라는 다리가 있으므로 도마다리라고도 부른다.
억만촌(億萬村)이라고도 부른다. 언덕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서 기와를 구웠으므로 왜말 왕야(旺也) 와촌(瓦村)이라고도 부른다.
해곡(蟹谷)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지형이 게(게)처럼 생겼다 해서 그리 부른
서천군 두산면(豆山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은적리와 대곡리의 이름을 따서 은곡리라 하였다. 평해구씨(平海丘氏)가 많이 거주한다.
마을에 감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감나뭇골이라고 부른다.
은적(隱寂)이라고도 부른다. 전에 은적사(隱迹寺)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은적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은적굴 그리고 은적이라고도 부른다.
대곡(大谷) 대곡리(大谷里)라고 부른다. 큰 골짜기에 마을이 있으므로 그리 부른다.
마을부근에 버드나무가 많으므로 유산이라고 부른다.
서천군 두산면(豆山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팔지(八支)와 서원(書院)의 이름을 따서 지원리라 하였다. 언양김씨(彦陽金氏)와 수원백씨(水原白氏)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마을이 신선의 난잎같다 하여 난곡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다 가곤 하였다는 신선지로 꼽히는 마을이다.
마을에 둥근 뫼가 있으므로 두루뫼라고 부른다.
서원리(書院里)라고도 부른다. 명곡(鳴谷)이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건암서원(建岩書院)이라고 부르는 서원이 있었던 마을이다.
성암(星岩)이라고도 부른다. 마을과 마을주변에 섶이 많이 있었으며 칠성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섶바탱이 성암이라고 부른다.
지수뫼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유곡 유곡리 유립 유립리라고도 부른다. 전답이 기름진 마을이라 그리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