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은 금강(錦江)으로 면해서 풍부한 수원으로 농어업에 종사하는 이상적인 전원지대이다. 한산군(韓山郡)의 남쪽이 되므로 남하면(南下面)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이 곳에 있는 화양산(華陽山)의 이름을 따서 화양면(華陽面) 이라 하였다.
지역을 개발하고 정착하여 오랜 세월을 뿌리로 한 성씨(姓氏)로는 나주정씨(羅州丁氏),교하노씨(交河盧氏), 양천허씨(陽川許氏), 나주임씨(羅州林氏), 한산이씨(韓山李氏), 안동권씨(安東權氏), 남원양씨(南原梁氏)등이 있다. 나주정씨는 210여호, 교하노씨 80여호,양천허씨 60여호, 나주임씨 120여호, 한산이씨 80여호, 안동권씨 70여호, 남원양씨 70여호가 큰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한산군 남상면(南上面)의 지역이었다. 지역이 고맛들 가운데가 되므로 고마(叩馬)라고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고마리(叩馬里)가 되었다. 교하노씨(交河盧氏)와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집성마을이 있다
한산군 남상면(南上面)의 지역으로서 검당이란 신당이 있으므로 금당이라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때에 금당리(琴堂里)가 되었다.
한산군 남하면(南下面)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기복리라 하였다. 나주정씨(羅州丁氏)의 집성마을이 있다. 나주정씨가 이곳에 내려오게 된 처음 중시조부터 현재 10대 손이 거주한다.
원봉(圓峯)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뒷산이 둥글게 생겼으므로 두루재 원봉이라고 부른다.
기산(箕山)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을 두르고 있는 산의 형국이 치와같이 생겼다해서 치울재라고 부른다.
한산군 남하면(南下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남생이처럼 생겼으므로 남생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남성이라고 부르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후에 남성리(南星里)가 되었다. 안동권씨(安東權氏)가 많이 살며 옛날부터 집성마을의 형성이 있었던 곳이다.
옛날 마을에서 기와를 구웠으므로 오얏골이라고 부른다.
광생(光生), 광생리(光生里)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을 두르고 있는 일광산(日光山)과 제월봉에 비치는 해와 달이 마을로 하여금 번성하게 한다고 해서 광생이라고 부른다 한다.
한산군 동하면(東下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남하면 대산리를 병합하여 대등리라 하였다.
샘의 물맛이 좋아서 옛날에는 한산군수(韓山郡守)가 길어다가 마셨다는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한다.
마을 뒷산의 등성이가 일곱이 된다 해서 등칠이라고 부른다.
땅속에 물이 많아서 배아래 물이 흐르듯 땅을 팔수록 물이 흔하다 하여 뱃챙이라고 부른다 한다.
산의 날등성이에 비석이 서있다 해서 비석날이라고 부른다.
등성이에 마을이 있으므로 잿밭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큰 절이 있었으므로 한절, 한저울, 대사(大寺)라고 부른다.
한산군 남하면(南下面)의 지역으로서 한저울 아래쪽이 되므로 대하(大下)라 불러오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혁후에 대하리(大下里)라 하였다. 나주정씨(羅州丁氏)가 많이 살며 나주정씨의 집성마을이 있었던 자리다.
용당(龍堂)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용제(龍祭)를 지내는 용왕당이 있어서 용당, 용댕이라고 불렀다.
한산군 남하면(南下面)의 지역으로서 이 곳에 있는 망월산(望月山)의 이름을 따서 망월리라 하였다.
옛날에 마을에서 배를 만드는 선소가 있었던 마을이라 그리 부른다.
신아(新牙), 신아리(新牙里)라고도 부른다. 금강가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강변에 새로 마을이 생길 때부터 신아포 신아라고 부르다가 신아리라고도 부르게 된 마을이다.
원래 옛날 안보 안보현(安保縣)이 있었던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안보향(安保鄕)이 되었다가 다시 뒤에 남하면(南下面)의 안뱅이 안보리(安保里)가 되었다.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현명을 보존한다는 뜻에서 보현리라 하였다.
옛날부터 서생이 많았으며 한때 글 읽는 소리가 끊기지 않았던 선비촌 이었다 한다.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창짓굴이라고 부른다.
대덕(大德) 대덕굴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의 역사도 오래된 곳이며 큰 터에 큰 덕을 베푸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된 마을이라 그리 부른다.
안봉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때 안보현(安保縣)이라고 부르는 현의 고을터이고 안보향의 고을터였었다. 마을이 아늑한 자리에 자리해 있다 해서 안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산군 남상면(南上面)의 지역이었다. 이곳에 있는 봉명산(鳳鳴山)의 이름을 따서 봉명리라 하였다. 한산이씨(韓山李氏)들이 오래토록 뿌리를 내리고 살며 집성마을도 이루고 있다.
옛날에는 마을앞으로 냇물이 흐르고 그 냇물을 망천이라고 불렀다. 그 냇물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망천이라고 불렀다.
황새가 우렁을 먹는 형국이라는 황새바위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황새배라고 부른다.
한산군 남하면(南下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옥산(玉山)과 포원(浦元)의 이름을 따서 옥포리라 하였다.
마을의 지형이 황소를 닮았다는 마을이다.
포원(浦元)이라고도 부른다. 옛날에는 큰 포구였으며 앞으로도 포구가 될 마을이라 해서 포원이라고 부른다.
앞으로 포구를 낀 큰 들이 조성될 지역이라 육원이라고 부른다 한다.
다고개라고도 부른다. 옛날에는 갯벌이었으나 한 분기점을 이루는 지점으로 넓은 들과 개의 사이에 설 마을이라 다고개 다고니라고 부른다 한다.
한산군 남하면(南下面)의 지역으로 기와를 구웠던 지역이다. 지새울 와초동(瓦草洞) 지호(芝湖)라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후에 와초리(瓦草里)가 되었다.
한산군 남하면(南下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후 완길(完吉)과 기포(岐浦)의 이름을 따서 완포리라 하였다.
기포(岐浦) 기포리(岐浦里)라고도 부른다. 금강가에 있는 마을로 게(게)가 많으며 곶이 표적이 되므로 기포 기포리 거름개라고 부른다.
한산군 동하면(東下面)의 지역으로 달고개 아래의 지역이므로 달고개 월령(月嶺)이라 불렀다.1914년 행정구역 개혁후 월산리라 하였다. 남원양씨(南原梁氏)70여호가 집성촌을 이루는 지역이다.
방죽건너에 마을이 있으므로 방죽건너라고 부른다.
옛날에 방죽이 있을 때 그 방죽의 안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방죽안이라고 부른다.
소나무밭을 넘어서 자리한 마을이다.
한산군 남상면(南上面)의 지역으로 옥포장(玉浦場) 위쪽이 되므로 장위 장상(場上)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장상리(長上里)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원가(院家)가 있었던 마을이라 원촌(元村)이라고 불렀다.
진목(眞木)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참나무정자가 있으므로 진목(眞木)이라고 부른다.
한산군 동하면(東下面)의 지역으로 대매 아래가 되므로 대매 또는 죽산(竹山) 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죽산리라 하였다.
면동(棉洞)이라고도 부른다. 목화(木花)가 잘 되는 지역에 마을이 있으므로 면동 변해서 미명굴이라고 부른다.
심마동(深馬洞)이라고도 부른다.옛날에 주점이 있어서 주막이 있었던 곳이며 사람도 쉬어가고 말도 쉬어가던 마을이라 한다.
한산군 남하면(南下面)의 지역으로서 남창(南倉)의 밭이 되므로 창의밖 또는 창의외 창외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혁때에 창외리라 하였다. 양천허씨(陽川許氏)가 많이 거주한다.
조선시대에 한산군의 남창(南倉)이 있었던 마을이라 남촌이라고 부른다.
창의 안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창의내라고 부른다.
한산군 남하면(南下面)의 지역으로서 가래나무가 있으므로 가래굴 또는 추동(楸洞)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혁때에 추동리라 하였다. 나주정씨(羅州丁氏)의 집성마을이 있는 구역이다.
옛날의 고려장지(高麗葬地)가 있었던 마을이라 한다.
구룡막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지형이 구렁이의 목처럼 생겼다 해서 구룡목 구룡막이라고 부른다.
새성굴이라고도 부른다.큰 묘같은 흙무덤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능밑이라고 부른다
대나무가 우거진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댓고개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마을부근에서 분토가 나온다 해서 분텃굴이라고 부른다.
장곡(長谷) 장곡리(長谷里)라고도 부른다. 고개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그리 부른다.
표동(瓢洞) 표동리(瓢洞里)라고도 부른다. 마을 지형이 바가지처럼 생겼다 해서 조빡굴 표동이라고 부른다.
고려때부터 마을에 여덟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다. 우아한 그 나무에 학이날아와서 신선지를 만들었던 마을이라 한다.
한산군 동하면(東下面)의 지역으로 지형이 곶으로 되어 있으므로 고지말 또는 화촌(花村)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후 화촌리라 하였다. 나주임씨(羅州林氏)가 많이 살며 100여호의 집성마을도 이룬 곳이다.
마을지형이 마치 밤송이가 벌어진 형국이라 한다.신라때 이 곳에 낙향한 선비가 그 후 밤나무가 무성하여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지조있는 선비를 가리켜 밤까시처럼 지조가 있다고 말하였다 한다.
한산군 남하면(南下面)의 지역으로 어성산(魚城山)아래가 되므로 수문골 은굴 숭문동(崇文洞) 활동 은동(隱洞)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활동리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