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유자와 모시는 8살에 처음 만났다. 그전까지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모시 작업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기만 하다가 8살부터 쩐지 밑에서 자투리(꾸무기)로 모시를 배웠고, 12살에 친할머니에게 정식으로 모시삼기를 배워 모시삼기 작업을 시작하였고, 15살에는 어머니를 통해 모시 짜는 것을 배웠다.
당시 동내 뒷산에는 모시를 짜기 위한 굴이 3개 있었는데, 두 개의 굴은 두 사람씩 들어가서 작업을 하고, 하나의 굴에는 한사람이 들어가 모시 짜는 일을 했다. 이 굴은 모시를 잘 짜는 사람만 들어가서 짤 수 있었는데, 어린아이가 열심히 하려는 모습을 보고 동내사람들이 한자리 내줘서 가운데 굴에서 베를 짤 수 있었다.
부모님은 모시 짜는 일이 힘든 일 이라는 것을 알기에 못하게 하려고 쫓아다니며 혼내고 도투마리를 몇 개고 계속 부쉈지만 모시 짜는 모습이 너무 멋져 보여 부모님 몰래 모시를 짜고 배우러 다녔다.
아버지가 계속 말리자 아버지 친구분의 모시를 몰래 짜왔는데, 아버지가 친구분의 모시를 짤 때면 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시를 짜면 끝까지 잘 짜내 나중에는 아버지도 모시 짜는 일을 허락해 주셨는데, 모 심을 철에만 하도록 허락해 주셨다.
모 심을 철에는 모시가 제일 비쌌고, 일손도 부족할 때였기 때문에 허락해 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날은 어머니 몰래 어머니의 베틀에 앉아 모시를 짜다가 모싯낫 20개가 후드득 떨어지자 어머니에게 혼날 것이 두려워 뒷산으로 도망을 갔는데, 하필 그곳에서 벌에 쏘여 울다가 보유자를 찾으러 온 어머니에게 호되게 혼나기도 했다.
어머니는 왜 자꾸 힘든 모시 일을 하고 싶어 하냐며 말렸는데, 어린마음에 어머니가 모시 짜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기에 어머니가 말렸음에도 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 남아있었다.
모시 매는 작업은 시집가서야 배울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매우 즐거웠다.
보유자는 임신했을 때에도 모시를 짰는데, 전통베틀은 폭이 넓고 조작이 어려운데 배까지 나와 북을 날리다시피 하며 베를 짰는데, 그마저도 즐겁게 느끼며 베를 짰다. 그저 모시를 만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막내아들이 5살이 되던 해에 유산 안영철씨네 모시공장에서 현대베틀을 알려줄테니 와서 배우지 않겠냐고 해서 현대베틀을 배우게 되었다.
전통베틀로만 모시를 짜왔었기에 개량베틀을 배워보고싶어 가게 되었는데, 아이가 어리다보니 맡길 곳이 없어 데리고 다녔다.
아이가 하루 종일 함께 있으니 힘들어하고 애를 데려와서 일에 방해가 된다며 사람들이 눈치를 줘 결국 그만두고 집에서 모시를 짜오다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다시 모시공장에 취직해 5년을 일하게 된다.
5년 후 공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모시를 짜려고 보니 마땅히 짤 공간이 없어 마루 밑에 굴을 파고 그곳에서 모시를 짰다.
모시를 맬 때는 시장의 장사하는 가게에서 모시를 맸는데, 공간이 여의치 않아 비가 올 때는 날아놓은 모시를 비닐로 꽁꽁 싼 후 플라스틱 통속에 넣어 비를 최대한 피해가며 조심스럽게 모시를 맸다.
보유자는 모시를 짜며 길쌈놀이를 배웠는데, 베를 잘 짜는 사람이 근방에 없었기에 보유자가 활동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보유자는 모시로 이어진 예인의 삶도 살게 된 것이다.
이 바탕에는 남편의 도움이 컸는데, 남편은 한산고등학교 서무과에서 근무하며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져 줬기 때문에 더욱 모시에 집중 할 수 있었다.
남편은 35년을 근무한 후 퇴직하였는데, 그간 남편의 공이 컸기에 그 이후의 삶은 보유자가 책임지고 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는 2남1녀를 두었는데, 세 아이의 대학은 보유자가 모시를 짜서 가르쳤다.
저산팔읍길쌈놀이는 고려시대 여러 문인들의 기록과 조선시대 군현별 길쌈경연대회의 기록, 일제강점기 저마조합을 만들어 생산을 장려하고 기술을 보호했다는 기록 등에 미루어 볼 때 우리고장 토속의 민속놀이로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후 여러 사건들로 인하여 그 명맥이 끊어졌다가 강경에 사는 박홍남씨의 제안으로 저산팔읍길쌈놀이가 다시 시작될 수 있었다.
1982년경 지역의 문화유산을 살려보자는 뜻으로 박홍남씨가 저산팔읍길쌈놀이를 기획하고 박길배 한산면장의 지시로 박성순씨가 함께 할 팀원들을 모으러 다녔다.
동자북마을, 지현2리, 유산리 사람들을 대상으로 모집했는데, 위 세 마을에 비해 자영업자의 비율이 많았던 지현1리는 저녁시간이 여유로운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길쌈놀이를 함께 연습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당시 지현1리에 살고 있던 대상자는 해당되지 않았으나 모시를 잘 아는 사람이 참여하면 좋을 것 같다는 유산리 사람의 추천으로 함께할 수 있었다.
세 마을에서 모인 사람들은 임천·홍산·보령·남포·비인·정산·한산·서천 8팀으로 나눠 매일 저녁 연습을 진행하였는데 보유자는 당시 비인팀의 팀원으로 모시 짜기 부분을 담당하였다.
매일저녁 성실중학교 운동장에 모여 연습을 진행했는데, 팀원간에 마음이 잘 맞아 연습이 순조로웠다.
매년 대회에 나갔고 국무총리상도 수상하였는데, 상을 타기 위해 출전하는 것이 아닌 한산지역을 알리는 공연이었기에 모두가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연습하고 공연을 다녔다.
부여·공주 등 인근지역에서 공연요청도 많이 왔는데, 모두가 한산모시와 길쌈놀이를 알린다는 사명으로 열심히 진행했다. 길쌈놀이는 모시 베끼기, 모시삼기와 꾸리감기, 모시날기와 모시매기, 모시짜기의 순서로 길쌈공연을 펼치고 노래가 끝나면 심사하기 공연을 진행하는데, 심사자가 중안에서 각 고을이 짜낸 모시를 심사한다. 임천은 성글고, 보령은 척이 짧고, 남포는 폭이 좁고, 서천은 가리가 들었고, 홍산은 대소울이 들었고, 비인은 탕이 났고, 정산은 변이 나쁘다 외치고 ‘오늘의 장원은 보름새로 짠 한산모시가 장원입니다.’ 라고 외치며 한산모시에 장원을 주면 모두가 함께 축하하며 공연을 마쳤다.
보유자는 이전까지 비인팀의 팀원으로 활동했으나, 1991년 저산팔읍길쌈놀이가 충남시도무형문화재 제13호로 등재되고 1993년 11월 4일에 지휘 및 감별부문 예능종목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구자홍 보유자의 이수자로 선정되며 지휘 및 감별부문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2008년 9월 22일 충청남도무형문화재 제13호 저산팔읍길쌈놀이 지휘 및 감별부문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후계자로는 막내아들인 권정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