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 방연옥은 문정옥 선생님한테 모시짜기를 배우면서 모시짜기 전 과정을 습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1980년 8월 1일 전수장학생이 되었고, 1986년 2월 28일에 이수자가, 1987년 7월 1일에는 전수교육조교가 되었다가 1991년 5월 1일에는 보유자 후보가 된 뒤, 2000년 8월 22일 문화재청으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사모시짜기의 보유자 인증서를 받았다. 문정옥 선생님의 후계자로 선정된 후 약 23년째 되던 해였다.
보유자가 모시짜기와 인연을 맺은 것은 밤나무 농사를 짓는 남편과 혼인한 후 몇 해 지난 때였다. 밤을 수확하려면 많은 인부를 사서 부려야 됐는데, 밤 값이 워낙 싸서 인건비도 못 건질 정도였다. 밤농사를 지어 생활하고 아이들 키우기에는 빠듯한 형편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문정옥 선생님을 만나 모시짜기를 배우게 되었다. 원래 시댁은 아랫동네인 구동리에 있었는데, 얼마 후 지현리로 이사를 왔다. 지현리에 살면서 한산장을 오가다 보니 문정옥 선생님이 댁 뒷채에서 모시를 펴놓고 혼자 매는 것을 보고 도와드리게 되었다. 그 후 짬이 날 때마다 문정옥 선생님 댁에 들러 도와드리던 중 문정옥 선생님이 “모시짜는 법을 일러주면 배울 수 있겠느냐”고 하시며 배우기를 권유해 198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모시짜기를 배웠다.
이 후 문정옥 선생님 댁으로 모시짜는 법을 배우러 다니면서 선생님께서 식사를 하시거나하여 틈이나면 베틀에 올라도 보고, 말코도 차보고 하였다. 그 후 모시짜기에 자신이 붙으면서 친정에 가서 어머니가 쓰시던 베틀을 가져왔다. 1980년 겨우내 째고, 삼고, 해서 1981년도 3월에 짜서 완성하였다. 생애 최초로 짠 모시 4필은 약 12만원을 받고 팔았다. 당시 쌀값으로 산정해 보면 쌀 2가마니 분으로 꽤 큰 금액이었다.
모시 짜기를 접한 것은 친정어머니를 통해서였다. 어머니는 화양면 와초리 출신으로 주로 가는 모시(세모시)를 짰었다. 어머니는 환갑이 넘어서까지 모시 짜기를 하신 걸로 기억하는데, 보유자가 모시 짜기를 배우려할 때마다 “모시 짜기는 힘드니까 배우지 말라”시며 만류하셨다. 그러나 모시 짜기를 하는 어머니 등에 업혀 자란 보유자는 어머니 어깨 너머로 모시 짜는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인지 6살 때부터 바디꿰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모시 짜기에 익숙해 있었다.
어머니께서 학교에 가라고 책보를 싸 주시면 학교에 가서도 어머니와 언니가 모시를 매고, 짜는 모습이 눈에 선하여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집으로 돌아와서 조금씩 도왔다. 어머니와 언니는 모시장이 서는 때를 맞추어 모시를 장에 내다 팔아야 했기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모시를 짰다. 어머니가 모시를 나는 것을 보고 배워서 그 다음부터는 학교가기 전 새벽이슬이 촉촉할 때 모시 한필을 날아 놓고 가면 언니는 바디를 써놓고, 그 다음날이면 어머니는 아침 식전에 불을 피워 모시를 매었다. 그리고 나면 어머니와 언니가 짜서 장날마다 모시를 내었다. 어머니가 모시를 맬 때면 등교하기 전 짬을 내어 도와 드렸을 정도로 어린 나이에 모시 일이 손에 익었었다.
보유자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이미 한글과 주산 등을 다 배워서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으나 육상만큼은 워낙 뛰어나 출전한 대회마다 상을 타오곤 하였다. 그 후 담임 선생님이 키가 크고 육상을 잘하니 육상부가 있는 중학교로 진학시켜주겠다고 하셨으나 어머니, 언니와 함께 모시를 짜고 싶은 욕심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모시를 하게 되었다.
보유자는 29세 되던 해까지 모시 짜기와 함께 집안일을 거들며 15년의 세월을 보냈다.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어머니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보유자는 서울로 가서 직장생활을 하며 살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만류로 바깥구경 제대로 못했다. 결혼 또한 늦은 편인데, 집안 내력과 신랑감이 장자인지 아닌지, 홀어머니 아들인지 아닌지 등을 따지다 보니 혼인이 늦어지게 되었다.
모시 짜는 어머니와 언니와 같이 모시 짜기를 하고 싶었으나 고생스러운 모시 짜기를 딸자식에게 물려 줄 수 없다는 어머니의 고집스런 사랑 때문에 약 15년간 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에서 고명딸로 자라 온 보유자는 결국 모시 짜기는 배우지 못했다.
보유자가 문정옥 선생님께 모시 짜기를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와 언니가 모시 짜기를 하는 것을 보고 자랐고, 모시 매기와 짜기 외에는 모든 과정을 익히 알고 있었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문정옥 선생님과 보유자만 전통베틀로 모시를 짜고 있었는데, 1980년대 중반 어느 곳에서 살다 왔는지 모르지만 모시짜는 사람이 이사를 왔다. 그 사람은 개량베틀을 가지고 이사를 왔는데, 동네사람들에게 개량베틀로 모시 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 당시에는 모시금이 매우 좋아서 동네사람들이 너도나도 배워 약 10여명이 개량베틀로 모시를 짰다.
전통베틀로 모시 1필을 짜려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약 3일이 소요되는데, 개량베틀은 하루 반나절이면 짰다. 그런 줄 알면서도 보유자는 문정옥 선생님의 당부도 있고 해서 전통베틀로 모시를 짰다.
그러나 개량베틀로 모시 짜기를 하는 동네사람들은 모시 날기와 매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모시 날기와 매기는 문정옥 선생님이 도맡아 하시기도 했다.
보유자가 개량 베틀로 모시를 짜기 시작한 때는 한산모시관이 건립(1993년 8월) 된 후 전수활동을 하면서부터이다. 전통베틀로 모시를 짜면 날고, 매고 하여 근 1주일이 소요되는데 비해 개량베틀은 쉽게 매어 쉽게 짤 수 있었고, 게다가 판로도 좋아 살림살이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항시 전통 베틀로 짜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이것은 자신이 전통을 잇는 사람으로서 그 도리를 다 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손발은 물론이고 허리를 써야 모시를 짤 수 있는 전통 베틀은 다루기도 힘들다. 모두가 작업의 효율성과 경제성만 앞세우는 지금, 전통 베틀이 자칫 박제처럼 진열된 전시품이 될까봐 안타깝다. 그래서 보유자는 더욱 열의를 가지고 후계자 양성에 힘을 쓰고 있다.
보유자가 되기 전 까지는 배워야겠다는 것만 생각하여 열심히 배우기만 하면 되었는데, 보유자가 된 지금은 “어떻게 후계자들을 잘 가르칠까?”가 제일 큰 걱정거리이다. 무엇보다 후계자는 10대에서 30대 중반 정도의 젊은 사람을 선발해 전통을 잇게 해야 하는데 모시 짜는 일이 워낙 고되기 때문에 배우려하는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보유자는 전통 베틀로 모시 짜는 사람들을 많이 양성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후계자들에게는 이 점을 항상 일깨우며, 개량 베틀로 모시를 짜더라도 전통 베틀을 곁에 두고 친숙하게 지낼 것을 권장하고 있으며, 보유자가 전통 베틀로 모시를 짜고 있을 때 전통 베틀로 모시 짜는 방법을 배우라고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