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천의 역사인물(인포그래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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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전체관리자 | 등록일 | 2015-12-29 | 조회 | 64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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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5 서천의 역사인물
① 어록으로 찾는 서천의 역사인물 여행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남에게 빌리지 아니한 것이 없다.” 고려 말 학자 가정 이곡의 <차마설>중 일부이다. 차마설은 가난해서 항상 말(馬)을 빌려 탔던 이곡이 말을 빌려 탄 체험을 기록한 책이다. 이곡은 이 과정을 통해 얻은 소유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물질적인 소유 뿐 아니라 ‘권력’에 대해서도 ‘임금도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린 것이고, 자식은 어버이에게서,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서 각각 빌리는 것인데 대부분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만 할 뿐’ 이라고 말하는 이곡의 가르침은 현 세대에도 일맥상통하는 메시지를 준다. 이곡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아들 목은 이색 또한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훌륭한 학자이자 문신이었다. 그가 남긴 시집 '목은시고(牧隱詩藁)'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제 때에 단비를 내려만 준다면 천하를 살찌게 할 수도 있으련만...' 백성들을 생각하며 '시우(時雨·제 때에 내리는 비)'를 갈망했던 목은의 깊은 탄식이 갈수록 ‘단비’가 절박해지는 이 시대에도 문득 다가오는 키워드이다. 서천군 기산면에 위치한 문헌서원(충남문화재자료 제125호)은 이곡, 이색의 정신과 가르침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이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매년 춘추향사제가 지내진다. “청년 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보배요, 한 나라의 보배요, 나아가서 한 천하의 보배이다” 청년을 사랑하고 또 ‘영원한 청년’이라 불리던 구한말 정치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이상재 선생이 남긴 어록이다. 이상재 선생은 1896년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후에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조선교육협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독립 운동과 민족 운동에 앞장 선 인물이다. 이상재 선생이 태어나 18세까지 살았고 1884년 갑신정변 후 낙향해 머물기도 한 생가가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 위치해 있다. 소박한 초가지붕 아래에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이상재 선생의 마음을 기억해보자. “왔다, 사랑했다, 그리고 갔다”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 ‘이하복 가옥’ 마당에 있는 기념비에 새겨진 이하복 선생의 어록이다. 묘비를 남기지 말라는 말과 함께 유언으로 남겼다고 전해지는 이 말에는 이하복 선생의 삶 전체가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 이하복은 자신의 재산을 헌납해 서천의 동강학원을 설립하며 농촌 계몽운동에 평생을 헌신했다. 자신은 낡은 초가집에서 평생을 살아오면서 묵묵히 고향인 서천의 인재 양성을 위해 전 재산도 아끼지 않은 초연한 삶을 살아왔다. 자신의 것을 찾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평생을 섬겼던 그의 일생을 들여다보며 시대를 관통하는 교훈을 찾아본다.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 중기 3대 여류 시인으로 알려지는 임벽당 김씨. 문장과 서법에 식견이 남달랐던 것으로 전해지는 임벽당 김씨는 7수의 시편을 남겨놓았다. 그 중 자신이 살던 마을에 대해 노래한 시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조용하고 깊은 곳, 벼슬 버리고, 산수 즐기며, 근심을 잊는 곳, 인간의 시비와는 전혀 무관한 곳, 꽃 피면 봄인 줄 알고, 잎 지면 가을인 줄 아네” 가난하고 고독한 조선시대의 여인의 삶을 살았던 임벽당은 지친 삶의 무게를 산수에 맡기며 잠시나마 근심을 잊었던 듯하다. 임벽당이 살던 지금의 비인면 남당리에는 임벽당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이 나무 아래 시비에는 같은 내용의 시가 새겨져있다. 이육사, 서정주 등과 동인지 ‘자오선’ 활동을 하기도 한 근대를 대표하는 시인 신석초는 서천군 활동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뿐 아니라 글을 썼고 또 지금은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적한 이 마을에서 온갖 욕망과 번뇌를 극복하고자 그가 노래한 ‘바라춤’의 한 구절은 바쁜 삶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새삼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 같다. '묻히리란다. 청산에 묻히리란다. 청산이야 변할 리 없어라. 나는 절로 질 꽃이어라. 지새여 드는 법고 소리 이제야 난 굳세게 살리라' "고생이요 고생이야 목에서 피가 나오고 노래를 너무 불러서 배가 붓고 하였으니 다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고종이 특히 사랑하여 통정대부의 직계를 내렸다고 전해지는 조선의 소리꾼 이동백이 남긴 어록이다. 그의 훌륭한 소리 뒤에는 피가 나오고 배가 붓는 고통을 감내한 예술 혼이 있었다. 이동백은 득음을 위해 희리산 동굴로 들어가 소리를 하고 또 독공을 위해 움막을 지어 연습 하며 소리를 연마했다. 피나는 노력 끝에 얻은 천상의 소리는 후세에게도 길이길이 기억되고 있다. 지금도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에는 희리산 동굴과 움막이 있던 ‘용구’, 살아온 집터와 마을까지. 이동백의 예술 혼이 서린 소릿길이 남아있다. 서천의 또 다른 발견, 유서 깊은 역사와 문화의 도시이다. 서천은 백제시대와 고려, 조선을 거쳐 오면서 수많은 위인들이 배출된 명지이며 각 시대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간 스승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들이 남겨놓은 어록들을 마음에 되새겨보며 그들의 삶과 정신을 닮아가는 ‘서천 역사인물 여행’을 떠나보자. 테마 5 서천의 역사인물 ② 고택에서 찾는 서천의 역사인물 여행 서천에는 유명한 선인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명소들이 다양하다. 목은 이색, 이상재, 이하복, 신석초… 등 많은 서천의 선인들은 그들의 깨달음을 통해 후손들에게 위대한 ‘메시지’들을 남겨 놓았다. 그들의 사색과 고뇌의 흔적이 남아있는 서천에서 잠시 바쁜 일상을 뒤로하고 선인들이 남겨놓은 ‘메시지’를 찾아 떠나는 ‘역사인물 여행’을 떠나보자.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는 명상과 사색의 명소, <문헌서원>이 있다. 고려 말 대학자인 ‘가정 이곡(李穀)’과 ‘목은 이색(李穡)’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이 곳은 이곡과 이색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정목은선생문집판(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7호)과 이색의 초상화인 영모영당본(보물 제1215-2호), 이색선생묘일원(충청남도 기념물 제89호), 이색신도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27호)를 볼 수도 있다. 무엇보다 고택 아래에 앉아 고려 말 학자의 삶이 깃든 이색의 ‘목은시고’, 물질만능주의의 현 시대에 깊은 교훈을 가져다주는 이곡의 ‘차마설’을 떠올려 보자. 두 학자의 학문과 덕행을 더듬으며 일상의 잡념이 비워지고 고귀한 선비정신으로 마음이 채워진다. 문헌서원 앞에는 고즈넉한 한옥에서 몸을 뉘이고 먹일 수 있는 치유와 휴식의 공간, ‘문헌전통호텔'이 자리 잡고 있다. 옛 전통 식도락 맛을 즐기는 문헌전통밥상(한식전문점)에 한 수저를 들고 솔 숲길을 따라 1,000년의 역사를 산책하고 돌아와 따뜻한 마룻바닥에 몸을 뉘이며 여유를 느끼는 하루는 옛 선비의 하루 그대로다.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는 ‘영원한 청년’이라 불리우던 이상재 선생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전형적인 농가 목조 초가집 형태의 이곳은 평생을 항일운동에 앞장서며 독립협회, 신간회 활동을 통해 청년들의 민족 교육에 힘써온 이상재 선생이 태어나 자라온 곳, 1884년 갑신정변 후 낙향해 머물렀던 장소이다. 뜨겁게 나라와 청년을 사랑했던 이상재 선생의 ‘절개’가 그대로 살아있는 듯한 ‘솟을대문’을 지나며 잃어버린 청년의 절개를 되찾아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에는 서천 교육의 선각자, 이하복 선생의 가옥이 자리 잡고 있다. 낡은 초가집에 푸근한 담장이 인상 깊은 가옥이다. 이하복 선생은 일본 유학파 출신이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부농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헌납한 진정한 시대의 교육자이다. 교수직, 장관직도 마다하고 묵묵히 고향의 인재 양성에 일생을 헌신한 인물이다. 평생을 초연하게 청빈한 삶으로 일관해 온 그의 삶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벼슬 버리고, 산수 즐기며, 근심을 잊는 곳, 인간의 시비와는 전혀 무관한 곳‘ 조선시대 대표 여류시인 임벽당 김씨가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를 두고 지은 시의 일부이다. 임벽당 부부가 살던 마을로 전해지는 남당리 마을은 부부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500년 된 25m의 은행나무가 반기는 곳이다. 은행나무 그늘 아래서 임벽당의 시를 묵상하며 잠시 세속의 무게를 잊고 산수를 즐기는 풍요로운 시간을 가져보자.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에는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신석초 시인의 생가터와 시비가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글을 숭상하는 마을’이라 해서 한 때 ‘숭문동’이라고도 불렸다고 전해지는 문학의 마을이다. '묻히리란다. 청산에 묻히리란다. 청산이야 변할 리 없어라'라며 청산을 노래한 시인의 작품처럼 신석초는 이곳에서 태어나 글을 짓고 지금은 이곳에 묻혀있다. 그의 묘비에 남겨진 그의 시처럼 활동리의 청산을 노래하고 세파의 고뇌를 청산에 묻어놓고 오는 가뿐한 여행길을 떠나보자. 서천에는 조선시대 내로라하는 명창들이 소리를 하던 지역이다. 조선 말 5 명창에 해당하는 이동백과 김창룡의 유허지가 서천에 있다.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에는 이동백 명창이 피를 토해가며 득음을 하던 희리산 용당굴과 독공을 하던 움막 ‘용구’가 있는 지역이다. 또한 서천군 장항읍 성주리 김창룡 명창의 유허지에는 지금은 울창한 대나무숲이 되었지만 판소리 대가의 불멸의 예술혼이 기려있는 곳이다. 이처럼 서천은 학문과 예술의 깊이가 무궁무진하다. 또 선인들이 메시지들을 통해 배움을 얻으며 풍요로움을 더하는 도시이다. 잠시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서천의 문화유산을 추억하며 몸과 마음을 살찌우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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